hund-01 님의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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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 4. 8.

    by. hund-01

    목차

      1. 연기의 본질과 심리적 자기 탐색의 시작

      연기란 단순히 역할을 흉내 내는 것이 아니라, 그 인물의 감정, 동기, 심리 상태에 깊이 몰입하여 ‘진짜처럼’ 살아보는 경험이다. 연극치료에서 이 연기의 행위는 단순한 연출이 아닌, 심리 탐색의 출발점이 된다. 우리는 일상 속에서 다양한 '가면'을 쓰고 살아간다. 직장에서의 모습, 친구 앞에서의 모습, 가족 앞에서의 모습은 때로는 상반되기도 한다. 이러한 다양한 정체성들은 종종 우리 자신을 혼란스럽게 하기도 하고, 진짜 감정을 숨기게 만들기도 한다.

      연극치료에서 연기는 이러한 ‘가면’을 의식적으로 탐색하고 해체하는 과정이다. 특정 역할을 부여받고 그 인물로 살아보는 동안,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투영하게 된다. 가령, 내담자가 '버려진 아이' 역할을 맡았을 때, 자신이 과거에 경험했던 외로움이나 상실감을 떠올리게 되고, 그 감정을 안전하게 드러낼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된다. 이렇게 연기는 내담자가 자신조차 인식하지 못했던 감정의 흔적을 발견하고 마주할 수 있도록 돕는다.

      또한, 연기는 자신의 감정을 외부화(externalization)하는 데 탁월한 도구가 된다. 머릿속에만 존재하던 감정이나 기억이 몸과 목소리를 통해 밖으로 나올 때, 그것은 더 이상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현실적인 경험으로 전환된다. 이는 감정의 무게를 줄이고, 심리적 해방감을 경험하게 만든다. 즉, 연극치료에서의 연기는 감정을 억제하거나 회피하지 않고 ‘표현함으로써 치유하는’ 과정이며, 이는 심리 치료의 핵심 원리 중 하나이다.

       

      2. 역할 몰입과 심리적 전이의 메커니즘

      연극치료에서 연기란 단순한 흉내를 넘어서, 역할 속으로의 몰입을 통해 내담자가 자신의 심리를 투사하고 변화시킬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이 과정에서 특히 주목할 점은 ‘심리적 전이(transference)’ 현상이다. 이는 개인이 타인이나 특정 상황에 과거의 감정을 무의식적으로 투사하는 심리현상으로, 치료 관계나 연기 상황에서도 뚜렷이 나타난다. 연극치료에서는 이러한 전이 현상을 역으로 활용하여, 내담자의 내면에 잠재된 심리적 갈등을 표면화하고 조명한다.

      예를 들어, 내담자가 폭력적인 아버지 역할을 맡게 되었을 때, 그는 그 역할 속에서 과거의 두려움, 분노, 혹은 죄책감을 다시 느끼게 된다. 그러나 이 감정은 단지 '배우는 중이다'라는 상황 안에서 표현되므로, 실제보다 덜 위협적으로 느껴지고, 표현에 대한 두려움도 줄어든다. 이는 심리치료에서 흔히 사용하는 '노출 치료'와 유사한 효과를 낳는다. 정서적 회피 대신 역할을 통해 감정을 직면하고 해소할 수 있는 안전한 장치를 제공하는 것이다.

      몰입의 깊이에 따라 연기의 심리적 효과도 달라진다. 얕은 수준의 연기는 감정의 표면만을 드러낼 수 있지만, 깊이 몰입한 연기는 감정의 본질에 도달하게 만든다. 이때 치료자는 내담자가 역할 속에서 표현하는 감정과 몸짓, 언어의 흐름을 주의 깊게 관찰하고 피드백함으로써, 내담자의 무의식적 패턴을 인식하게 돕는다. 연기는 결국 내담자가 자신의 감정을 몸 전체로 체험하게 만드는 통로이며, 이 과정을 통해 억압된 감정의 해소뿐 아니라 인식의 변화까지 유도할 수 있다.

       

      연극치료

      3. 연기를 통한 감정 조절 훈련과 자기 통합

      연기는 감정의 폭발이 아닌 감정 조절의 훈련장이 되기도 한다. 연극치료에서 감정 표현은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 감정을 ‘어떻게 다루고, 조절할 수 있는가’이다. 연기를 통해 분노, 슬픔, 기쁨, 두려움 등의 감정을 체험하고 표현하면서도, 그것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조절할 수 있는 역량이 생긴다. 이는 정서조절 능력이 부족한 아동, 청소년, 혹은 감정 기복이 심한 성인 내담자에게 매우 유익하다.

      또한, 다양한 역할을 경험하면서 우리는 우리 안의 여러 ‘자기(Self)’를 만나게 된다. 때로는 희생자였던 자신, 때로는 억압자였던 자신, 또는 지혜로운 조언자였던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이러한 경험은 내면의 다양한 정체성 조각들을 하나로 통합하는 과정으로 이어진다. 연극치료에서 말하는 **'자기 통합(self-integration)'**은 개인이 자기 내면의 다양한 모습들을 인정하고 수용함으로써 더 안정된 자아상을 형성하는 것을 의미한다.

      감정은 억제한다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연기를 통해 감정을 ‘연기’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그것을 이해하고, 다시 해석하고, 더 건강하게 다룰 수 있는 힘을 얻게 된다. 특히 자신의 트라우마를 연기를 통해 ‘다시 쓰기(re-narration)’ 하는 기법은, 고통스러운 기억을 새로운 시각에서 바라보게 하고, 감정의 회복력을 강화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결국 연극치료에서 연기는 단순한 표현이 아니라 감정을 해석하고 재구성하는 심리적 기술로 기능한다.

       

      4. 연기에서 진정한 자아로: 자기이해와 치유의 완성

      연극치료에서 연기를 반복하는 과정을 통해 내담자는 점차 자기 이해의 깊이를 넓혀간다. 처음에는 단순한 역할 수행이었던 것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 역할이 왜 나에게 익숙하게 느껴지는가?', '이 감정은 어디에서 왔는가?' 하는 질문으로 확장된다. 이는 곧 자기 성찰로 이어지며, 단순한 감정 표현에서 더 나아가 내면의 구조를 탐색하고 재조립하게 만든다. 이때 치료자는 질문과 피드백을 통해 내담자가 역할에서 실제 자신의 심리적 과거로 이동하도록 돕는다.

      연기의 행위는 반복될수록 내담자에게 새로운 자각을 가져다준다. 특히 자신이 그동안 인식하지 못했던 감정이나 욕구, 혹은 회피하던 기억이 무대 위에서 ‘타자’의 형태로 나타나면서, 보다 안전하게 접근하고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연극치료는 이처럼 **‘타인의 모습으로 나를 보는 거울’**이 된다. 거울 속 타인을 연기하면서 사실은 나를 비추고 있는 셈이다. 이 독특한 치료 구조는 일반 심리상담과는 다른 강력한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치유는 단지 감정을 드러내는 것에서 그치지 않는다. 그것을 이해하고, 수용하고,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과정까지 나아가야 한다. 연극치료에서 연기는 이 모든 과정을 가능하게 하는 매개체다. 특히 마지막 단계에서 내담자가 ‘자신의 이야기’를 쓰고 연기하는 ‘자전적 극화’ 기법은, 진정한 자아와의 만남을 가능하게 하며, 궁극적으로 자기 수용과 심리적 회복을 완성하게 만든다. 연기는 단순한 표현 수단이 아니라, 자기 발견과 회복을 위한 예술적 도구이자 심리학적 기술인 셈이다.